칠레 남부 파타고니아 초입에 위치한 차이텐(Chaitén)은 화산 폭발의 상흔과 원시림이 뒤엉킨 특별한 도시다. 2008년의 대폭발로 폐허가 되었던 이곳은 이제는 자연의 재생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여행지로 탈바꿈했다. 푸말린 국립공원의 숲과 온천, 황량한 화산 지형, 그리고 적막 속을 걷는 혼자만의 트레킹은 여행자에게 일상의 소음을 잊게 한다. 차이텐은 도시의 분주함과는 완전히 다른 리듬으로 나를 초대한다.
재로부터 피어난 조용한 마을, 차이텐
칠레 남부의 차이텐은 많은 이들에게 생소한 이름이다. 하지만 파타고니아를 남쪽에서부터 천천히 여행해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특별한 인상을 남긴다. 한때 이 작은 마을은 2008년 차이텐 화산의 폭발로 인해 지도에서 지워질 위기를 맞았다. 뜨거운 화산재와 진흙이 마을을 뒤덮었고, 사람들은 대피했다. 이후 몇 년 동안은 유령 도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곳은 조용히, 그러나 놀라운 회복력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다시 공존하는 마을로 돌아왔다. 차이텐을 찾는 혼자 여행자에게 이 도시는 말이 없다. 소란스럽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차이텐만의 매력이다. 여행자는 이곳에서 ‘경이’보다 먼저 ‘침묵’을 마주하게 된다. 불타버린 나무들 사이에서 새롭게 자란 이끼와 풀, 마을 가장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집터, 그리고 부서진 다리와 녹슨 표지판. 그 모든 것이 이곳이 한때 생과 죽음의 경계였음을 말해준다. 혼자 이곳을 걷는 일은 어쩌면 작은 순례와도 같다. 세상의 중심에서 벗어난 장소, 인간의 힘이 자연 앞에 얼마나 미약한지를 느끼게 해주는 공간,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자연이 다시 살아가는 이야기. 차이텐은 그런 이야기를 낯선 여행자에게 조용히 건네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무언의 풍경 속에서 우리는 삶의 복잡함을 잠시 내려놓게 된다. 화산이 덮고 간 그 땅 위에서 다시 싹튼 마을. 그곳에 나 하나, 그렇게 홀로 서 있는 일은 결코 외로운 일이 아니다.
푸말린 국립공원과 화산의 품에서 걷는 하루
차이텐 마을에서 여행자가 가장 먼저 찾는 장소는 ‘푸말린 국립공원(Pumalín National Park)’이다. 이 공원은 민간 자연보호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이다. 미국 기업가 더글라스 톰킨스(Douglas Tompkins)가 개인적으로 구매한 이 넓은 땅은 이후 칠레 정부에 기증되어 국립공원이 되었다. 덕분에 이곳의 숲과 계곡, 호수, 온천은 개발되지 않은 채 원시림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푸말린 공원 내에는 다양한 트레킹 루트가 마련되어 있으며, 대부분은 비교적 난도가 낮은 편이다. 그중에서도 차이텐 화산 트레일은 가장 상징적인 코스다. 시작 지점은 차이텐 마을에서 차로 약 20분 거리에 있으며, 주차 후 트레킹을 시작하면 약 3시간 내외로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올라가는 길에는 2008년 분화 당시 쓰러진 나무들과 그 위에 자란 새로운 식물들이 공존한다. 산소가 짙은 숲길과 화산재가 쌓인 회색 흙, 그리고 정상에서 바라보는 거대한 분화구. 그 풍경은 말 그대로 ‘재에서 피어난 자연’이다. 트레킹을 마친 후에는 인근의 천연 온천에서 피로를 풀 수 있다. 온천은 간이 형태로 운영되며, 화려하지 않지만 자연과 맞닿은 온도가 피부를 넘어 감정까지 따뜻하게 만든다. 혼자 온 여행자에게 이 온천은 사교가 아닌 회복의 시간이다. 물속에서 말없이 바라보는 하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멀리서 울리는 새소리. 모든 것이 고요하게 내 옆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저녁 무렵에는 다시 차이텐 마을로 돌아와 로컬 식당에서 간단한 식사를 한다. 대부분의 식당은 소박한 집밥 분위기이며, 해산물과 훈제연어, 신선한 빵과 수프가 중심이다. 사람들과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 친절하지만 과하지 않은 인심. 차이텐은 여행자를 지나가는 손님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손님으로 받아들인다. 그 ‘잠시’는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
삶의 여백을 발견하는 혼자의 여정
차이텐은 많은 것이 없는 도시다. 대형 마트도 없고, 명확한 관광지도 적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이곳의 가장 큰 가치다. 바쁘게 달려온 삶의 속도에서 벗어나,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장소. 차이텐은 그런 여백을 제공한다. 혼자 떠나는 이들에게는 그 여백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의 목적이 된다. 이 도시는 과거의 상처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상처를 드러낸 채 살아간다. 그럼에도 마을 사람들은 일상을 이어가고, 자연은 계속해서 회복된다. 여행자 역시 그런 이 공간의 리듬에 자연스럽게 동화된다. 빠른 인터넷도 없고, 특별한 쇼핑거리도 없지만, 걷고, 먹고, 쉬고, 바라보는 일상이 유난히 의미 있게 다가온다. 차이텐은 조용히 속삭인다. "조금 느려도 괜찮다. 지금 이 순간, 여기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혼자 떠난 여행이 막막하고 불안할 수 있지만, 차이텐에서의 시간은 혼자여서 더욱 완전하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아도 될 감정, 아무 말 없이 채워지는 하루. 그것이 바로 차이텐이 혼자 여행하는 이들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