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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치오 언덕 위 사라지는 마을, 치비타 디 바뇨레조 혼자 여행하기

by goldengeneration 2025. 8. 12.

이탈리아 라치오 주의 고원 위에 외따로 솟은 마을, 치비타 디 바뇨레조(Civita di Bagnoregio)는 ‘바람에 사라지는 도시’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부식되는 응회암 지형 위에 놓인 섬 같은 마을은 가느다란 인도교로만 드나들 수 있어, 현대의 소음으로부터 자연스레 격리된 시간이 흐른다. 붉은 벽돌과 석조 회색이 뒤엉킨 골목, 텅 빈 듯 고요한 광장, 절벽 너머로 끝없이 이어지는 테베레 계곡의 능선은 혼자 여행자를 위한 완벽한 무대를 만든다. 유명 관광지와 달리 상업적 장식이 덜해 장소 자체의 이야기가 오롯이 남아 있으며, 걸음이 느려질수록 더 많은 표정을 드러낸다. 이 글은 치비타 디 바뇨레조에서 혼자 머무는 법을, 역사와 지형, 동선과 감각의 언어로 자세히 안내한다.

무너지며 남는 것들, 고요의 서사와 마주하다

치비타 디 바뇨레조에 닿는 방법은 단순하다. 바뇨레조 마을 외곽 주차장에 차를 두고, 가느다란 보행교를 천천히 건너면 된다. 하지만 체감은 단순하지 않다. 발아래 깊은 계곡과 바람, 저 멀리 이어지는 라치오의 누런 들빛이 감각을 정지시키고, 도시의 리듬에서 벗어난 다른 박자가 몸을 점령한다. 마을이 ‘바람에 사라지는 도시’라 불리는 이유는 수사적 과장이 아니다. 응회암과 점토가 층층이 쌓인 언덕은 비와 바람에 쉽게 깎이고, 마을은 세기를 넘어 조금씩 후퇴했다. 이 느린 침식의 역사는 돌담과 벽 틈의 풀, 성벽 밖으로 떨어져 나간 절벽의 단면에 빽빽이 기록되어 있다. 혼자 걷는 여행자에게 이 기록은 박물관의 패널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누구의 해설도 없이 시선과 호흡만으로 읽어내야 하는 원문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씩 교량을 건너며 뒤를 돌아보면, 현대의 일상은 교량의 입구쯤에서 이미 멈춰 서 있고, 앞에는 중세의 시간이 무표정하게 서 있다. 바람은 말이 없고, 종소리는 드물게만 들린다. 관광의 욕심을 부릴 것도, 이곳에서 ‘해야 할 것’을 급히 체크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조급함을 내려놓을수록 공간은 더 많은 층위를 내어준다. 돌을 쌓아 올린 골목의 거칠음, 햇빛에 달궈진 벽의 냄새, 테라코타 지붕 사이로 흘러드는 계곡의 바람, 작은 성당 문짝에 남은 손때까지. 고립과 고요는 외로움이 아니라 밀도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이곳에서 배운다. 우리는 대개 도시에서 너무 많은 정보와 자극에 노출되어 있어, 비어 있는 채로 충만해지는 경험을 잊곤 한다. 치비타는 신호를 최소화하여 인지의 잡음을 꺼버리고, 감각의 해상도를 높여 준다. 혼자 있을수록 또렷해지는 진폭,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이야기의 두께, 그 속에서 여행자는 자신의 내면과 마주한다. ‘사라지는’ 장소가 선사하는 가장 역설적인 선물은, 바로 오래 남는 기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골목·광장·절벽, 세 겹의 무대에서 걷기와 머물기의 기술

치비타 디 바뇨레조의 동선은 세 겹으로 읽을 수 있다. 첫째는 ‘골목’이다. 문을 밀고 들어가야 하는 실내의 친밀함 대신, 노천의 골목은 마을의 숨결이 직접 드러나는 통로다. 입구 아치(Porta Santa Maria)를 지나면 폭이 사람 한 명 남짓한 골목이 이어진다. 돌로 맞물려 만든 바닥은 불규칙해 발바닥이 리듬을 기억하게 하고, 작은 안뜰과 화분, 담장 위 고양이가 시선을 붙잡는다. 지도에 표기된 명칭보다 동선의 리듬이 중요하다. 천천히, 멈추고, 다시 걷는다. 둘째는 ‘광장’이다. 산미셸레 대성당 앞 작은 광장은 실감 나는 시간의 소용돌이이다. 주민 몇 명이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관광객이 흩어져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소음은 번지지 않는다. 바람과 종소리가 공간의 볼륨을 조정하기 때문이다. 광장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중앙이 아니다. 한편 그늘, 혹은 담장 모서리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으면 시야는 자연히 낮아지고, 사람들의 움직임이 배경처럼 흐르며, 공간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셋째는 ‘절벽’이다. 마을 가장자리로 나가면 테베레 계곡의 너른 숨이 맞는다. 석양 무렵, 절벽 위 난간에 서면 계단식 지층이 황금색으로 발열하고, 멀리 오르비에토 방향 능선은 미묘한 보랏빛으로 가라앉는다. 이 조용한 광경 앞에서 혼자라는 사실은 결핍이 아니라 해상도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감정의 미세한 떨림이, 소리 없이 또렷하게 기록된다. 실용적인 정보도 중요하다. 바뇨레조에서 치비타로 향하는 보행교는 경사가 있어 한낮에는 햇볕이 강하다. 이른 오전이나 해질 무렵이 좋다. 성수기의 낮 시간은 단체 방문이 잦아 골목이 좁게 느껴질 수 있으나, 한두 시간만 비켜나면 금세 고요가 돌아온다. 마을 내 숙박은 객실 수가 적어 조기에 마감되므로, 바뇨레조 본촌에 숙소를 잡고 새벽에 천천히 도보로 오르는 일정이 좋다. 물과 간단한 간식을 챙기되, 쓰레기는 반드시 되가져온다. 응회암 절벽은 예민한 생태와 직결되어 있어 작은 무심함이 침식의 속도를 앞당긴다. 식사는 골목의 오스트리아에서 간단한 움브리아·라치오식 메뉴를 권한다. 펙치노 치즈를 곁들인 파니노, 올리브유를 살짝 친 토스티, 지역 와인 한 잔이면 충분하다. 혼자 먹는 식사가 어색하다면 창가 자리에서 바깥 풍경을 안주 삼아라. 여기서는 적막이 최고의 양념이다. 마지막으로, 사진보다 기록을 남겨 보라. 벽의 질감, 바람 방향, 종소리의 간격 같은 비시각적 요소는 글과 메모로 더 오래 살아남는다. 치비타의 핵심은 ‘보이는 것’과 ‘느껴지는 것’ 사이의 간극을 조율하는 일이며, 그 작업은 혼자일 때 비로소 완성된다.

사라짐을 배워 남게 되는 것, 혼자 여행의 완성

치비타 디 바뇨레조에서의 하루가 저물면, 해가 절벽 너머로 미끄러지고 마을은 빠르게 어둑해진다. 상점의 셔터가 내려오고 광장에는 드문드문 발자국 소리만 남는다. 이때 보행교를 건너며 뒤를 돌아보면 마을은 공중에 떠 있는 섬처럼 보인다. 낮의 디테일이 지워진 자리에는 형태만 남고, 형태마저 어둠 속으로 녹아든다. 사라지는 풍경을 배웅하는 이 짧은 시간, 여행자는 알게 된다. 우리가 집착하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이었음을, 그럼에도 잊히지 않는 장면은 따로 있음을. 치비타는 ‘유지’가 아니라 ‘소멸’로 존재의 의미를 증명한다. 그리고 이 역설은 혼자 여행의 본질과 닿아 있다. 함께면 덜 외롭지만, 혼자여야만 들리는 목소리가 있다. 함께면 빨리 지나가지만, 혼자여야만 느리게 남는 시간이 있다. 우리는 종종 채움으로 여행을 정의하지만, 치비타는 비움으로 여행을 완성한다. 실용적으로도 이 경험은 오래 남는다. 도시의 과속에서 잠시 이탈해, 걸음의 길이와 호흡을 조정하고, 하나의 장소를 고요히 응시하는 법을 배우면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속도 조절’의 감각이 몸에 남는다. 치비타가 알려주는 기술은 거창하지 않다. 더 천천히 걷기, 더 오래 보기, 덜 찍고 더 적기, 그리고 떠날 때 가벼워지기. 이 간단한 규칙은 다른 어느 도시에서도 통한다. 결국 여행은 목적지가 아니라 방법이며, 대상이 아니라 태도다. ‘사라지는 도시’에서 배우는 이 태도는, 우리가 사는 곳에서도 유효하다. 무너짐을 두려워하기보다 흐름을 이해하고, 남길 것을 선별하는 일. 그래서 치비타에서의 혼자 여행은 귀환 이후의 삶을 은근하게 바꿔놓는다. 언젠가 다시 올 수 있을지 몰라도, 오늘 들이마신 바람과 발바닥이 기억한 리듬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치비타는 그렇게, 조용히 우리를 단단하게 만든다.